덮어두는 것들 — 8·9·10화 전문 (고장 · B형 · 두 갈래)
사물함은 마흔 개인데 열쇠는 서른아홉 개다. 오십삼 년을 B형으로 산 사람에게 A형 통보서가 온다. 혼자 사는 집 수도 고지서에 스물두 톤이 찍힌다. 연작 「덮어두는 것들」 8·9·10화 전문과, 세 편을 그렇게 쓴 이유.
연작 「덮어두는 것들」 8·9·10화 전문이다. 1화 「사전」은 여기, 2·3·4화는 여기, 5·6·7화는 여기에 있다.
이 연작은 규칙 하나로 쓴다. 매 편에 물증이 하나 나오고, 인물이 그걸 덮는다.
- 1화 「사전」 — 자기 오역을 덮는다
- 2화 「간」 — 자기 솜씨를 덮는다
- 3화 「봉투」 — 사람을 덮는다
- 4화 「대출카드」 — 남이 덮어준 것을, 못 본 자리에 그대로 둔다
- 5화 「배나무」 — 연도를 덮는다
- 6화 「상장」 — 아이 이름을 덮는다
- 7화 「셔터」 — 고맙다는 말을 덮는다
- 8화 「고장」 — 이유를 덮는다
- 9화 「B형」 — 자기 몸을 덮는다
- 10화 「두 갈래」 — 남의 몫을 덮는다
세 편 합쳐 읽는 데 6분쯤 걸린다.
8화 — 고장
그가 목욕탕을 넘겨받은 게 지난달이다. 앞사람은 십사 년을 했다.
넘길 때 종이 한 장을 같이 줬다. 사물함이 마흔 개라고 적혀 있고 수건 이백 장과 보일러 두 대도 적혀 있다.
열쇠걸이에는 서른아홉 개가 걸려 있다.
24번 사물함에 「고장」이라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24번 열쇠는 카운터 서랍에 따로 있었다. 열어봤다.
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힌다. 경첩도 멀쩡하다.
붙은 종이 귀퉁이가 들떠 있길래 손톱으로 젖혀봤다. 아래에 한 장이 더 있다. 그 아래 또 한 장.
세 장이다. 글씨체가 다 다르다.
앞사람한테 전화를 걸었다. 24번이 왜 고장이냐고 물었다.
자기도 넘겨받을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그 앞사람한테 물어봤더니 그쪽도 같은 말을 하더라고 한다.
그럼 언제부터냐고 물었다.
잠깐 있다가 말했다. 그건 안 물어봤다고.
지난주에 손님이 24번을 달라고 했다. 스물넷이 자기 나이라고 했다.
그는 고장이라고 말했다. 열쇠는 서랍에 있었다.
그날 저녁에 보니 종이가 바닥에 있었다. 습기에 풀이 삭았다.
그는 카운터에서 종이를 한 장 잘랐다. 「고장」이라고 적었다. 세 장 위에 붙였다.
네 장째다.
9화 — B형
회사 앞에 헌혈 버스가 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건 군대에서다.
문진표 혈액형 칸에 B라고 적었다. 서른 해 넘게 어디서든 그렇게 적어왔다.
이 주 뒤에 통보서가 왔다. 검사 결과 칸에 A형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오십삼 년을 B형으로 살았다.
전화를 걸었다.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담원이 조회를 했다. 잠깐 있다가 말했다. 이천이십일 년에도 한 번 하셨네요.
그때 것도 A형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사 년 전이다. 그때도 통보서가 왔을 텐데 기억이 없다.
정정하려고 헌혈의 집에 들렀다. 직원이 화면을 돌려 그쪽으로 놓았다.
줄이 두 개 있다. 위가 사 년 전, 아래가 이번 것. 혈액형 칸의 글자가 같다.
그는 두 줄을 다 봤다.
막상 직원이 정정 신청서를 드릴까요 묻자 괜찮다고 했다.
집에 와서 통보서를 접었다. 고지서 모아두는 상자에 넣었다.
사 년 전 것도 그 안에 있다. 꺼내보지 않았다.
지갑에 헌혈증이 한 장 있다. 군대에서 받은 것이고 뒤에 B형이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다.
글씨가 번져 있다. 그는 지갑을 닫았다.
10화 — 두 갈래
아버지가 지난달에 돌아가셨다. 그가 집을 정리하러 내려왔다.
부엌 찬장에서 고지서 뭉치가 나왔다. 해마다 고무줄로 묶여 있다. 제일 아래 묶음에 1994년이 적혀 있다.
사용량이 매달 스무 톤 안팎이다. 지난달 것에는 스물두 톤이라고 적혀 있다. 그 집에는 아버지 혼자 살았다.
마당에 나가 계량기함을 열었다. 관이 두 갈래로 나간다. 한 갈래는 담을 넘어간다.
수도과에 전화를 걸었다. 주소를 불러줬다.
계량기가 하나고 명의가 아버지라고 한다. 놓은 해가 1994년이다.
담 너머 집에는 계량기가 없다. 거기 할머니 한 분이 산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 자리에 계셨다.
수도과 창구에 직접 나갔다. 직원이 분리 공사를 안내했다. 관을 새로 묻고 계량기를 하나 더 놓는 일이다.
지난 것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나눠 낸 기록이 없으면 요금 쪽에서 손댈 게 없다고 한다. 그건 당사자끼리 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서른두 해다.
신청서를 받아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 그 집 앞을 지난다.
대문 옆에 화분이 하나 나와 있다. 리본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다. 장례식장에서 따라왔다. 흙이 젖어 있다.
그는 그 앞을 지나 집에 들어갔다.
이튿날 명의만 자기 이름으로 바꿨다. 신청서는 안 냈다.
왜 이렇게 썼나
세 편에서 덮는 까닭이 한 칸씩 인물 바깥으로 나간다.
7화까지 인물들은 전부 자기가 무엇을 덮는지 알았다. 혼자 알고 덮거나, 7화처럼 둘이 알고 덮었다. 8화의 목욕탕 주인은 모른다. 종이 세 장의 글씨체가 셋이라는 건 적어도 세 사람이 이어서 덮었다는 뜻인데, 그중 누구도 처음 까닭을 모른다. 아는 쪽은 언젠가 그만둘 수 있다. 모르는 쪽은 그만둘 자리가 없다. 네 장째 종이를 붙이는 손은 앞의 손들과 같은 일을 하는데 그 안이 비어 있다.
9화는 반대쪽 끝이다. 앞의 여덟 편은 아무도 짚어주지 않았다. 이 사람한테는 직원이 화면을 돌려 두 줄을 나란히 놓아 주고 신청서까지 권한다. 그는 다 보고 덮는다. 몰랐다는 핑계를 이 연작에서 처음으로 치운 편이다.
10화에서는 까닭이 처음으로 자기 쪽을 떠난다. 앞의 아홉은 창피하거나 귀찮거나 몰라서 덮었다. 이 사람은 고치면 자기가 덜 낸다. 그런데도 명의만 바꾸고 신청서는 안 낸다. 고치는 순간 서른두 해치를 따져야 하는 사람이 담 너머에 생긴다.
물증은 여전히 뺄셈이다. 마흔과 서른아홉, B와 A, 혼자 사는 집과 스물두 톤. 세 편 다 두 값을 나란히 놓고 빼는 일은 읽는 쪽에 맡겼다. 8화에서 「아무도 까닭을 모른다」고 한 줄 적으면 글씨체 세 가지가 할 일이 없어진다. 10화의 화분 흙이 왜 젖어 있는지도 안 적었다. 담 너머로 물이 어떻게 가는지는 계량기함이 이미 말했다.
덮는 동작은 이번에도 결말에 왔다. 네 장째 종이를 붙인다. 지갑을 닫는다. 명의만 바꾼다.
세 편의 작업 메모를 다시 열어 보니 편마다 같은 기록이 붙어 있었다. 동작을 앞 편과 겹치지 않게 한 기록이다. 7화에서 견적서가 서랍에 들어갔으니 9화의 통보서는 서랍이 아니라 고지서 상자로 갔다. 9화가 접어 넣는 동작으로 끝났으니 10화에는 넣는 동작을 아예 안 썼고, 대신 하나는 하고 하나는 안 하는 선택을 뒀다. 5화의 인물은 덮으려고 서류를 새로 만들었고, 9화의 인물은 정정 신청서를 안 만든다. 열 편째가 되니 새 편을 쓰기 전에 앞 편 결말부터 다시 읽게 된다.
감정어는 세 편에서 0개다. 9화의 인물이 통보서를 받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헌혈증 뒤에 번진 손글씨가 대신 맡았다.
마무리도 이번에 물음 없이 벴다. 4화와 5화를 물음으로 닫은 뒤로 다섯 편째 그렇게 하고 있다.
전문으로 옮기면서 손본 데를 적어 둔다. 스레드판은 첫 글에 물증부터 보이고 이어지는 글에서 이야기를 푼다. 여기서는 물증 문장을 이야기 순서 자리로 내려놓았다. 10화에는 문장을 하나 더 넣었다. 스레드판에는 수도과에 전화로 묻고 곧바로 창구에서 신청서를 받아 나오는 대목이 붙어 있어서, 창구에 직접 나가는 문장을 끼웠다.
11화는 아직 안 정했다.